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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리뷰

고통회피-행복추구의 시대

by jb213 2021. 10. 31.

2021년 들어 접하는 글 중에서 거시적으로 맥이 비슷한 철학적 생각이 존재하여 정리해본다.

'고통'이란 무엇인가. 고통을 일부러 만들고 그 속으로 들어가 의미를 만들어내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존재할 시간과 공간이 있었다, 한때는. 그런데 현재는 작년부터 시작된 대-동학개미 운동으로 인해 자산 가치가 많이 부풀려지고 사람들은 세속의 맛, 돈의 맛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코시국을 맞아 일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 노동이 그저 아주 하찮은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라는 생각 또한 하게 되었다. 만약 내가 일하지 않고도 최소한의 삶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기본소득 등)이 있다면 현재의 무의미하고 하찮은 노동을 언제든 그만두겠다는 생각이 만연해졌다.

특히 미국에서 로봇으로 당장 대체하기 어렵지만 '하찮은 일'에 속하는 대부분의 업이 구인난을 겪고 있다.

 

이를 관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철학 주제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일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리고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물음에 훌륭한 답을 낼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왜냐하면 시대성이 80년대의 의미추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80년대는 국가적 변화와 전환을 위해 개인이 집단의 뜻을 기꺼이 따르는 대의명분의 시대였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꽤 멋있게 비춰지기도 했다.

 

이후는 그 변화를 이뤘다는 개인이 자유를 추구하는 90년대가 등장했다. 자유로운 나에 도취되어 온갖 실험적인 문화현상들이 나왔다. 여기서 그 유명한 슈게이징 음악도 나왔다 ㅋㅋ생각해보면 슈게이징이 정말 90년대의 정수같은 게 엄청난 소음으로 오히려 완벽한 공백을 유지하고 온갖 소리를 다 때려넣어서 채우고 또 채우면서 역설적으로 사운드의 공(空)을 만들었다. 90년대의 잉여스러움은 어떻게 보면 여유고 세상을 만끽하는 태도도 포함한다. 

그 유명한 앨범. 마블발의 'loveless'. 사랑없는. 슈게이즈 장인 케빈 쉴즈옹은 이 고난의 수행으로 인해 심한 이명증을 겪게 됨..ㅜ

2000년대 이후로는 행복을 추구하고 저녁이 있는 삶 등 이전보다는 전체적인 삶의 역동성은 조금 떨어지는 형태가 유행이 된다. 사실 이전 세대들이 이념을 위해 발로 뛰고 열심히 쟁취하는 단계가 이후 세대로도 지속된다면 그 사회는 어쩌면 변화의 속도가 더디고 통제가 심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 역설적이게도 고통스러운 사회와 불합리함을 고치고 나서 그 결과로 얻은 잠깐의 자유의 순간을 거치고 나면 남는 것은 평평하고 영원한 행복의 시간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엄청난 압박과 고통의 시대를 의미를 만들어내가며 싸운 뒤에는 어쩌면 영원한 유토피아만이 남아있고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기 어려운 평평한 사회가 될 수 있는 거다. 누군가는 그게 왜 나쁘냐고 할 수도 있다. 맞다. 행복 추구가 나쁜 게 아니다. 오히려 이전까지 너무 달렸기 때문에 지금 이런 행복 추구의 시대성이 아주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시의적절하다.

하지만 의미를 추구하던 80년대를 지나 변화를 만들어낸 뒤 결과적으로 찾아온 자유추구의 90년대가 지금의 행복추구의 2000년대 이후로 변했다는 걸 생각하면 그 다음은? 이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행복추구 다음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다음이 존재할 수 있는가? 내가 행복해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등의 질문을 던지면 생각보다 이런 식의 움직임이 '반드시' '옳으냐'는 사실 좀 다른 문제다. 이런 과정 속에서 나는 의미도 필요없고 자유로움도 필요없으며(대부분 자본주의적 이유로 인해..) 그저 내가 세운 기준에 맞춰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 그럼 행복이 작은 8평에서 매일 라면만 먹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각종 영상을 보면서 나를 다독이는 것이어도 되느냐라고 하면 그렇다가 나온다. 이런 삶이 옳다 나쁘다를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행복'이라는 단어가 시대성을 갖는 순간 그 행복은 각 개인의 입장으로 아주 잘게 쪼개져 정의내려진다.

이 말은 사회가, 회사가, 국가가, 사회구조가 개인을 억압하는 관점이 단계적으로 해체되기 아주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복의 정의가 파편화되어 개인이 점점 자신을 내부 검열하고 행복해지기 위해 생각을 수정하며 현실과 크게 타협하는 순간 순간 개인보다 더 큰 회사, 사회, 정부는 사라진다. 그렇다면 의미추구의 시대가 그렇게 쟁취하려고 했던 정의와 더 나은 삶으로의 노력은 이제는 아예 그 동기부터 상실된다. 아예 '나'보다 더 큰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비관적으로 보자면 지금의 사회가 행복추구형이기 때문에 개인이 더이상 개천에서 용나는 식의 엄청난 노력이 먹히지 않는 것이다. 그런 시도들은 모두 막혀있고 앞으로도 더 막힐 예정이다. 3포세대? 5포세대? 이젠 모든 것을 포기한 세대가 자신의 '행복'만은 지키려고 최후의 발걸음을 한 걸수도 있다. 아예 자신이 사회를 바꿀 의미를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조차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오히려 더 필요한 것은 '고통'이다. 고통의 체험이고 적극적인 고통의 사고가 어느 때보다 더 필요하다. 나는 왜 지금 고통스러운가? 그리고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 고통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행복을 추구하는 시대가 장기집권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의미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냥 나 혼자 해봤자라고 생각해서 안하는 거다. 그런데 누가 이 엄청난 고통을 승화해서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의미를 만들어낸다면 어떨까. 그 의미를 공유하고 '행복'이라도 얻기 위해 족쇄를 달아버린 개인을 자유롭게 풀어줄 방법을 알려준다면 말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이어져온 '고통-자유-행복'의 시대성은 반복되는 것일수도 있겠다. 다만 그 반복이 세분화되어 산발적으로 나타날 뿐. 지금의 사회가 가진 숙제는 결코 쉬운 문제를 푸는 게 아니다. 그런 건 애초에 공감대가 다 형성되었다. 거짓말도 못한다. 그냥 쉬운 문제는 내일부터 어떻게 하겠다고 하면 끝난다. 정말 숙제로 남아있는 건 행복의 시대에 섞여있는 고통을 해결해 자유롭게 개인을 풀어주고 행복의 시대를 살도록 하는 거다. 그런데 행복의 시대는 개인마다 그 행복을 추구하는 속도와 방법이 다르다. 저마다의 행복속도를 어떻게 조율하느냐, 이 미세한 공정에 사회의 역할이 아직 남아있다. 그리고 개인 또한 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고통이 되진 않는지를 돌아보는 것도 매우 좋겠다. 고통은 아직 필요하다, 그것도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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